공자시대2-이때는
공자시대2-
공자를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공자 시대의 중국은 역사의 전환점에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사실상 기원전 14세기의 商왕조에서 시작되는데 문화가 많이 발전해 있던 이 나라는 기원전 1122년에 서쪽 변경에서 침입한 이민족 연합에게 정복되고 말았다. 이 이민족 연합을 이끌고 있는 것은 周족이었고 그들은 周왕조를 건설했다. 商왕조에 비해 문화가 많이 뒤떨어져 있던 周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문화적 역량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할 수 없이 친척과 정복사업에 협력한 다른 부족에게 영토를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왕조 내의 평화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영토를 맘대로 지배하는 봉건제도가 발전했다.
그러나 周가 마치 이상향의 국가처럼 묘사된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주조된 청동기 명문을 보면 제후들은 다른 이민족의 침략에 늘 직면해 있었고 이는 제후간의 결속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피지배민을 회유하기 위해 지나친 억압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편으로 사용 된 것이 자신들의 정복을 정당화하는 선전이었다. 즉, 周이전의 왕조인 夏나 商이 처음과는 달리 나중에 폭군을 냈음을 지적하고 자신들의 정복은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천명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중에 중국에서 혁명권이 나오게 만든 요인이었다.
해가 갈수록 제후들은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따라 전쟁이 빈번해졌고 공자가 태어나기 200년전인 기원전 771년엔 봉건 제후와 이민족이 손을 잡고 周의 西都를 공격해 周는 멸망하고 東周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주는 이미 힘을 잃은 상태여서 일부 제후의 괴뢰에 불과하였다. 이에 동주국가들은 동맹 내의 가장 강력한 제후를 뽑아 ‘覇’라는 칭호를 주고 사실상 왕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공자가 태어날 무렵, 중국은 이미 주변 강국과 중원의 약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공자의 고향인 魯나라는 약소국이면서도 周의 정통성을 가진 周公이 세운 나라이며 고대 문화의 보고라는 이유로 쉽게 멸망당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노나라 역시 침략에 시달렸고 이는 대부분의 중원 국가와 마찬가지였다. 이런 혼란상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힘이 없는 약소국은 정복당할 때마다 강대국과 귀신의 이름 앞에 약정을 맺었고 이 약정은 다른 강대국이 쳐들어올 때까지만 유효했다. 사회에는 점차 회의주의가 만연하고 약속보다는 힘을 중시하는 윤리가 고개를 들었다. 또 귀신의 존재마저 의심받게 되는 등 인간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은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는 고사하고 안전조차 항상 위협받았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화를 위한 전쟁에 서민들을 동원했고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사냥을 다니거나 단순한 취미로 농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유 없이 백성들을 죽이기도 했다. 형벌은 잔혹해서 齊에서는 발 을 자르는 벌이 너무 흔해 발을 잘린 사람들을 위한 신발을 시장에서 팔 정도였다고 한다. 충절을 지키는 신하도 있었으나 이런 사람들은 극히 적었고 근친상간이나 권력을 이용해 남의 아내를 빼앗는 일은 보편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귀족은 물론 귀족의 가신들도 자신의 군주와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길 원했기 때문에 서민들의 처지는 갈수록 궁핍해 갔다.
이러한 사회의 상황은 자기 모순을 낳았고 스스로 붕괴될 조짐을 만들었다. 여자를 맘대로 차지하게 된 귀족들은 아들들을 너무 많이 낳아 곧 모두 관직이나 영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닥쳤고 혈통이나 교육은 귀족으로 받았으나 생활은 일반 서민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 생겨났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 했고 사회를 증오했으며 전체 백성의 입장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사람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