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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가계는~

소소한 행복 2019. 3. 13. 15:46

공자의 가계는~



공자의 가계는 확실치 않다. 그의 족보가 左傳에 나오기는 하지만 공자가 商王朝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은 믿기 어렵다. 그는 나라 諏邑에서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으며 형과 조카딸 그리고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고아였다는 주장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부인에 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어 후세의 전설에 이혼했다는 설도 있다.

공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미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교육도 받았고 음악과 궁술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조상은 하급이나마 귀족이 아니었나 한다. 공자는 젊은 시절 창고지기나 목장 관리를 하며 생계를 이었으나 이 때의 고생은 그에게 일반 백성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했다. 이는 후에 신분을 초월한, 능력에 의한 기회균등을 주장하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공자는 아첨할 줄을 몰랐으며 정치가로서보다는 타고난 철학자요 교사로서의 재능을 가졌다. 하지만 공자의 꿈은 훌륭한 철학자나 유명한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명성을 얻고 인류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대부분 관료가 됨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관직을 얻고자 열망했다. 하지만 관직을 얻지 못함으로서 그는 오히려 그는 당시 빈약했던 학문 연구와 교육, 그리고 궁전의 의례를 연구할 시간과 지적인 평정을 가질 수 있었다.

공자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학식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지만 이것은 그가 고전을 많이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고전 중에는 그 때 아직 저술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었고 책도 귀해서 끽해야 대나무에 글을 써서 끈으로 묶은 이 책의 역할을 대신했다. 물론 시경을 비롯해 책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문헌을 인용할 때 극히 겸손했고 다른 사람이 의견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그가 고전의 연구를 통한 고대 질서의 부활을 꿈꾸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많이 다른 것이다.

주왕조의 영광을 공자가 찬양한 곳이 논어에 가끔 보이는데 이것은 사실 공자가 주나라 시대를 그리워 했다기 보다는 제후가 난립하는 세상에서 이들을 평정할 강력한 하나의 왕조의 탄생을 기대하고 를 그 하나의 모델로서 상정한 것이 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제후가 난립하는 상황에선 정상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국가가 공자 생존 중에 탄생했다면 그는 아마 격렬한 어구로 이 위대한 단일 왕조의 역사적 숙제를 강조했을 것이다. 그것은 신분 귀족제의 폐지와 실력과 인격에 기초한 관리 선발이다. 궁극적으로는 왕도 이런 원리에 의해 백성 가운데서 선발할 것을 생각했겠지만 공자는 지나친 이상향 주장으로 현실적인 성취마저도 잃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이점에 관해서는 10장 개혁가 편에서 다시 다룬다.

사실 공자는 세력 있는 지위를 상속받지도 못하였고 권력자에게 아첨을 할만큼 권모술수에 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을 세상에 펼칠 만한 위치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점은 공자가 영원한 이상가로 남는데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공자는 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고 국사를 좌우했다고 하는데 와의 회담에서 기지를 발휘해 노공을 납치하려는 제의 계획은 좌절되고 빼앗긴 영토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논어나 맹자엔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좌전에만 있는 것을 볼 때 조작이라고 생각된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공자는 큰 공을 세운 것이 되고 높은 벼슬까지도 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공자에 대한 거짓 전설은 자신의 우상을 자신의 이상향에 투영하려는 후세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마징가 제트나 슈퍼맨을 우상으로 삼고 이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어린아이들의 심리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함은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野人으로서 인류의 갈 길을 밝힌 점에 있는 것이다. 만약 모든 훌륭한 사상이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면 인류는 자신의 평범함에 슬퍼하며 학문의 연구는 위인에게 맡기고 머리칼이나 뜯었을지 모른다. 잠시 이야기가 샜지만 어쨋든 공자는 관직을 바라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자신을 기용할 군주를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공자는 에 있을 때와 여행 중에 딱 두번 벼슬을 제의 받았는데 두 번 다 그리 정통성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한번은 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에서 온 제의였고 또 한번은 의 가신이 성을 점령하고 공자를 초청한 것이었다. 두번 다 공자는 제의를 수락하려 하였으나 제자인 子路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동양의 대학자가 작은 읍, 그것도 반란군의 관리가 되고 싶어하였다는 사실로 살아 있을 때 그가 얼마나 이상을 펴고 싶어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 얼마나 현실에서 무시당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론 아무 성과도 없는 이 여행은 공자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가장 큰 사건이 되었다. 앞에 먼저 말했지만 이 여행으로 그가 얼마나 평범하고도 무시 받던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으며 또 그가 얼마나 이론의 실현을 위해 절치부심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국에 돌아 온 공자는 이웃 국의 어린 임금이 귀족인 에 의해 살해 된 사건을 접하고 정부에 군사 개입을 간언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묵살되고 마침 아들과 가장 아끼는 제자 顔回의 죽음을 맞게 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자로는 자신의 군주를 지키다가 살해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공자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구나!” 하고 비통해 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479년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