論語 편찬자에 대해서도 여러 설
論語의 편찬자에 대해서도 여러 설
① 子夏를 비롯한 70제자라는 설
② 子夏․仲弓․子游 등의 撰定이라는 설
③ 曾子의 문인인 樂正子春과 子思의 무리라는 설
④ 曾子와 有子의 문인이라는 설
⑤ 閔子騫의 문인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漢代의 劉向(B.C 77-B.C 6)은 그의 別錄에서, 孔子의 제자들이 훌륭한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漢書 「藝文志」와 후한의 趙岐(?-201)의 孟子題辭, 隋書「經籍志」, 양나라 劉勰(?-473)의 文心雕龍 등이 모두 그의 견해를 따랐다. 皇侃은 論語義疏에서 孔子 사후 70제자가 함께 찬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子夏․仲弓․子游 등의 撰定이라는 설은 鄭玄의 論語序에서이다. 당대 육덕명은 經典釋文 「敍錄」에서 “ 論語는 중궁과 자하가 찬정한 것이다” 라는 鄭玄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 邢昺은 이 鄭玄의 말에 자유 두 글자가 빠졌다고 했다. 즉, 邢昺은 “鄭玄의 말은 본래 論語는 중궁과 자유와 자하가 찬정한 것이다.”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晉代의 傅休(217-278)는 ‘중궁의 무리가 孔子의 말을 추론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송대 陸九淵(1139-1192) 등이 鄭玄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중궁과 자유․자하는 모두 論語 「先進」편에 보이는 四科十哲 속에 들어 있고, 특히 자유와 자하는 문학에 뛰어났다 했으니, 이들이 論語의 형성과 전혀 무관할 리는 없을 것이다.
세 번째의 설로서, 악정자춘과 자사의 무리라는 설은 당대 柳宗元(773-819)이 제시하였다. 그는 論語辨 「상편」에서,
누가 물었다. “儒者들이 論語는 孔子의 제자가 기록했다는데 맞습니까?”
대답하기를 “아니야. 孔子제자 중에 증삼이 가장 젊어서 孔子보다 46세 연하야. 증자는 늙어 죽었는데 論語에 증자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그러니 孔子와는 시대가 매우 멀어. 증자가 죽을 때 孔子 제자는 거의 생존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야. 내 생각에는 증자의 제자가 기록한 것 같아. 왜냐고? 이 책에서 제자는 반드시 字로 썼는데 유독 증자․유자만 그렇지 않단 말야. 이렇게 말한 것은 제자가 호칭했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유자는 왜 子라고 했습니까?”
“孔子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제자들이 유약이 孔子와 닮았다고 해서 스승으로 섬겼지. 그 뒤 사람들의 물음에 잘 대답을 못해서 쫓아내 버렸지. 그러니 원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있었어. 지금 기록된 것에 의하면 증자만이 제일 뒤에 죽었거든. 내가 그래서 알았지. 아마 樂正子春이나 子思의 무리가 기록했을거야.”
라고 하여, 증삼이 임종할 때의 말이 論語의 말에 나와 있으므로 증삼이 論語를 찬정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나 그를 子로 칭한 것으로 보아 論語는 증삼의 문도인 악정자춘과 자사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혹 孔子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雜記하여 놓은 것들도 있었을 것이나 그 책을 이룩한 것은 증자의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유약을 有子로 칭한 것은 다른 제자들이 그를 孔子 섬기듯이 섬기라고까지 존경하였으므로 특별히 子로 불렀을 뿐이고 그 제자가 論語의 찬정사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한편, 朱熹(1130-1200)는 論語序說에서 정자(程頤)의 말이라 하면서, “ 論語는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 두 사람만이 論語에서 孔子와 함께 子를 붙여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의 姚鼐같은 사람은 증삼과 유약을 論語에서 子로 칭한 것은 孔門에서 그렇게 불러오던 것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고 따로 경중을 두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論語의 내용 중에는 물론 孔子의 제자가 직접 孔子의 말을 듣고 손수 기록했던 것들이 들어있을 것이나 論語 전체의 편성은 孔子의 제자가 다시 전한 제자 내지 그 이후의 선비들에 의해 이루어 졌을 것이다.
민자건의 문인이 편찬자라는 설은 남송의 洪邁(1129-1202)이다. 그는 容齋隨筆에서, 孔子가 제자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顔回나 冉雍같은 高弟도 모두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오직 閔損만은 子騫이라는 자로 부르고 있으므로, 論語는 閔氏에게서 나온 책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명나라의 張燧 등 이 설을 따른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밖에 청말 章學誠(1738-1801)은 文史通義 「詩敎上」에서 “ 論語에는 증자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吳起가 증자를 스승으로 섬겼으니, 증자의 죽음은 전국 초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論語는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라고 하였다. 예기 「檀弓」편에 의하면 자하가 西河에 살면서 제자를 가르칠 때 증자가 아직 생존해 있었다. 錢穆의 「先秦諸子繫年」에 보면 이 때 자하가 63세였다. 증자는 자하보다 2살 연하이므로 이 때 61세이다. 孔子가 죽을 때 증자는 27세였다. 그런데 論語에는 증자가 임종할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 것으로 論語의 편성은 아무리 빨라도 孔子가 죽은 후 30년이 지난 후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증자에게 병이 있어서 孟敬子가 위문하였다.” 는 말로도 증명할 수 있다. 孟敬子의 이름은 捷으로 孟武伯의 아들이다. 孟武伯은 魯哀公 27년 (孔子 사후 11년)에도 생존해 있었다(애공 27년의 좌전에 나옴).그러니, 그 아들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그리고 論語는 벌써 맹경자를 시호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章學誠이 論語가 전국시대에 이루어졌다는 말은 믿음직한 증거가 있다.
이밖에도 많은 이설이 있다. 어쨌거나 論語는 孔子가 직접 쓴 글이 아니고 그의 사후에 기록한 것임은 분명하다. 한편, 論語의 내용에 따라 작자를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論語 20편이 그 앞 10편과 뒤 10편의 내용상 성격에 차이가 있으므로 한 시기에 한 인물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청대 崔述(1740-1816)은 洙泗考信錄과 論語餘說(모두 東璧遺書에 실림)에서 論語의 편자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곧, 論語 20편 중 앞 10편만이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므로 孔子와의 시대가 가깝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서 禮制가 분명하며, 뒤 10편은 후세 사람들이 續記한 것이므로 세도가들이 날뛰던 시대의 영향을 받아 제도에 관한 말에 이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뒤의 10편에서도 특히 후의 5편은 「子張」편에는 오로지 제자들의 말만이 기록되어있고, 나머지 「季氏」․「陽貨」․「微子」․「堯曰」 네편에는 의심스런 대목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특히 이 끝머리 5편은 앞 15편과 문체가 두드러지게 다르고, 앞에서는 孔子의 말을 모두 “자왈”로 인용하고 있는데 비하여 “孔子왈”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고, 孔子를 부를 적에도 夫子이외에 仲尼라 하기도 하고, 또 孔丘라 호칭한 곳조차도 있다. 따라서 끝머리 5편은 더욱 후세에 붙여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곧 論語는 앞 10편이 정편이라면, 뒤 10편중의 다시 앞머리 5편은 속편의 성격을 지녔고 끝머리 5편은 잡편의 성격을 지녔다고 본 것이라 하겠다.
근세의 학자들은 각자의 입장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최술의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는 없다. 그러니 論語란 한때 한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책은 결코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이다. 孔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기록을 모아 이루어 놓았던 것을 근거로 하여, 전국시대를 통하여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서 보태어지고 다듬어진 끝에, 우리가 지금 보는 것과 같은 論語는 漢代에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