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
(중국어: 孔子,
병음: Kǒngzǐ 쿵쯔[*]) 또는 공부자(중국어: 孔夫子, 병음: Kǒngfūzǐ 쿵푸쯔[*], 라틴어: Confucius
[kənfjú:ʃəs] 콘푸키우스[*],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
· 사상가 · 교육자이고,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 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자(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징재(顔徵在)를 맞아 공자를 낳았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다.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한다. 서른 살에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선 것이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된다. 그는 학원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평민의 자제까지 '묶은 고기'(束脩) 이상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나 가르쳤다. 공자는
<시경> <서경> <주역> 등의 경전을 가르쳤다.
공자는 노나라에 살았다. 따라서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周公)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다.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다. 봉건제는 종법제라 한다.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한다.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한다.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종친들이 된다. 이래서 종법이라 한다. 공자 당시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 혼란했다. 노나라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해서, 노나라를,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35세 때
소공(昭公) 25년 노나라에 '삼환(三桓,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 등 당시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 기원전 517년에 제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여러 모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었다.
춘추 시대 (기원전 770~403)의 중국
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왕의 측근 배신(陪臣)인 양호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면서 중도재(中道宰[3])가 되었다. 52세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가 참석한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서 예전에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 주도록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으며, 난신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축출하는 데 참여하였다고도 한다(기원전
496년.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공자의 인망은 해를 더할수록 거듭 높아져 기원전 499년에는 대사구(현재의 법무부 장관) 벼슬에 기용되었고 최고 재판관 및 외교관직도 겸하게 되었다.
당시
공자는 순장될 뻔한 아이를 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때까지 이어져 오던 순장의 악습을 왕에게 간하여 끝내 폐하였다. 또
제나라 경공과의 회동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단지 협상만으로 노나라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는가 하면,
당시 권세가였던 삼환씨의 횡포를 꺾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三城)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두르는 계손사를 타도하려고 여러 모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성사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계손사의 미움을 받은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수십 명의 수행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켜 줄 어질고 현명한 군주를 찾아 기약 없는 여정에 나섰다.
무려 10여년이 넘게 걸린 이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기간은 성인(聖人)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고달픈 세월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 같은 봉변으로 인해 여행 도중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도덕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당했다. 당시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후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는
지덕(至德), 지선(至善)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必也正名乎),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君君臣臣),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父父子子) 각자가 본분을 지킴으로써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사회적으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盡己), 남을 부축하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強惡)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을 비롯한 제덕(諸德)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강악(強惡)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다.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는 두루두루 소통하되 끼리끼리하지 않고, 소인은 끼리끼리하되 두루두루 소통하지
않는다.'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 설파하였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온화·원만하였다.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는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공자가 활동했던 시기의 은자(隱者)들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장자》에서 도척이 공자에게 하는 말이나 '논어'
18:7 에서 노인이 공자에 대해서 '팔다리로 부지런히 일도 하지 않고, 오곡도 분간하지 못하는데, 누가 선생님이란 말이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생산활동을 도외시하고 결과[利]보다는 뜻[義]를 고려하는 태도에 회의적이였던 의견들이 당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산활동을 하지않는 사(士)계급에 대한 비판은 법가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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