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소소한 행복 2019. 3. 15. 17:07

논어의 여러 판본


󰡔論語󰡕라는 책명이 실려 있는 가장 오래된 전적은 󰡔예기󰡕이다. 곧 󰡔예기󰡕 「坊記」에 “󰡔論語󰡕에 이르기를 ‘삼년 동안 아버지의 도를 바꾸지 않는다면, 효도라 할 것이다.’ 라 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예기󰡕도 漢代에 와서 완성된 책이니, 漢代 이전에 󰡔論語󰡕란 책이 있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그러기에 청대의 黃以周같은 이는 󰡔答論語三十篇問󰡕이란 글에서 한대 초까지도 󰡔論語󰡕란 본시 지금과 같은 20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孔門의 스승과 제자들의 토론한 말 전체를 뜻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漢書󰡕 「藝文志」에 실린 󰡔論語󰡕 12家만 보더라도, 지금의 󰡔論語󰡕의 前身인 󰡔古論󰡕, 󰡔齊論󰡕, 󰡔魯論󰡕 등 뿐만이 아니라, 󰡔孔子家語󰡕 27권․󰡔孔子三朝󰡕 7편 등의 책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후한 王充(27-100전후)은 󰡔論衡󰡕 「正說」편에서 “ 󰡔論語󰡕란 제자들이 함께 孔子의 언행을 기록한 것인데, 한나라가 일어나자 亡失되었다. 武帝 때 孔子의 집 벽 속에서 고문이 발견되었는데 21편이었다. 宣帝 때 太常博士에게 내려주었는데, 그 당시는 이 책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졌고, 그 것을 傳이라 불렀었다. 뒤에 다시 隸書로 베끼어져 傳誦되었다. 처음에 孔子의 자손 공안국이 벼슬 荊州刺史에 이르렀던 노나라 사람 扶卿에게 가르쳤는데 비로소 󰡔論語󰡕라 일컬었다.” 라고 하고 있다.
논형의 이 주장에 의하면 孔安國과 扶卿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비로소 󰡔論語󰡕란 명칭이 생겼다는 것인데 잘못된 주장이다. 그 이유는 첫째, 한 文帝때 벌써 󰡔論語󰡕박사가 있었다. 둘째, 󰡔예기󰡕 「坊記」에서 “삼년 동안 아버지의 도리를 바꾸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을 인용할 때 ‘論語曰’이라고 하였다. 「坊記」가 지어진 시대는 늦어도 서한 초년 이전이다. 이 두 가지로 보면 󰡔논형󰡕의 주장은 오류이다. 한나라가 일어나자 󰡔論語󰡕가 없어져서 공벽고문이 발견된 뒤에야 다시 세상에 傳誦되게 되었다는 말은 더욱 근거 없는 헛소리이다.
근래의 吳承仕같은 이도 󰡔經典釋文疏證󰡕에서 그처럼 한나라 초기에 󰡔論語󰡕란 칭호가 생겨났다고 주장하고 있다. 漢代의 전적들을 보면 󰡔論語󰡕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孔子왈’하고 쓴 것이 가장 많고(史記 󰡔宋世家贊󰡕, 劉向의 󰡔說苑󰡕, 󰡔漢書󰡕「藝文志」, 應劭의 󰡔風俗通󰡕, 王充의 󰡔論衡󰡕), 그 밖에는 ‘전왈’(󰡔史記󰡕 「封禪書」, 󰡔漢書󰡕 「宣帝紀」), ‘경왈’(󰡔漢書󰡕 「于定國傳」)이라 하거나. 다만 ‘論’(董仲舒의 󰡔春秋繁露󰡕, 󰡔漢書󰡕 「張禹傳」), 또는 ‘語’(桓寬의 󰡔鹽鐵論󰡕)로만 부르고 있고, 󰡔論語󰡕란 칭호는 많이 쓰이지 않고 있다(󰡔漢書󰡕 「郊祠志」등). 이것은 󰡔論語󰡕란 책이름이 비교적 늦게 유행된 때문인 것도 같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孔子왈’하고 인용한 󰡔論語󰡕의 글 속에는 孔子의 말이 아닌 제자의 말까지도 포함되어 있고, 魏․晉대로 가서는 그러한 보기가 더 흔히 눈에 띄게 된다. 그래서 청대의 翟灝(?-1788)는 󰡔四書考異󰡕에서 본시 󰡔論語󰡕는 맹자의 책을 맹자라 불렀던 것처럼 孔子라고도 불렀던 듯하다고 하였다. 兪樾(1822-1907)도 󰡔論語鄭義󰡕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다. 그러니 孔子의 언행을 적은 이 책에 󰡔論語󰡕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 한초라 보아 크게 잘못은 없을 것이다.
󰡔論語󰡕 판본의 형성에 관해서도 가장 빠른 자료는 󰡔漢書󰡕 「藝文志」이다. 그에 의하면 한나라 때에는 󰡔齊論語󰡕․󰡔魯論語󰡕․󰡔古論語󰡕 등 세가지 󰡔論語󰡕가 전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魯論󰡕은 원래 노나라 사람 伏生이 전한 것으로 今文 즉 隸書이다. 󰡔魯󰡕 20편, 󰡔傳󰡕 19편과 󰡔魯夏候說󰡕 21편, 󰡔魯安昌候說󰡕 21편, 󰡔魯王駿說󰡕 20편의 4家로 나누어져 있다. 이 󰡔魯論󰡕 20편은 현존하는 󰡔論語󰡕의 편수와 합치된다. 이중 󰡔魯夏候說󰡕은 한 宣帝(B.C 73- B.C 49재위)때의 학자이며 禮와 書經에도 정통하였던 夏候勝이 詔命으로 지은 것이다(邢昺소). 󰡔魯安昌候說󰡕은 成帝(B.C 32-B.C 7재위)때의 丞相을 지낸 학자로, 󰡔易經󰡕에도 정통하였던 安昌候 張禹가 지은 것이고, 󰡔魯王駿說󰡕은 역시 성제 때의 학자인 王駿이 지은 것이다. 오경에 통달하였던 그의 아버지 王吉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漢書󰡕 「왕길전」). 이밖에도 󰡔漢書󰡕 「藝文志」에는 󰡔魯論󰡕를 전한 사람으로 전한때의 龔奮․韋賢․魯夫卿․蕭望之 등을 들고 있고, 위나라 何晏(?-249) 등의 󰡔論語集解󰡕 서문에는 韋賢의 아들 韋玄成을 들고 있다. 이들 중에 장우는 가장 뒤의 세대에 󰡔論語󰡕를 깊이 연구하여, 후세에 큰 영향을 준 듯하다.
한편, 제나라 사람이 전해온 󰡔論語󰡕를 󰡔齊論󰡕이라고 하는데, 이 제론은 원래 齊人 盧勝이 전한 것으로 금문이다. 󰡔漢書󰡕 「藝文志」에 󰡔齊󰡕22편․󰡔齊說󰡕29편의 2家가 있다고 하였다. 󰡔제설󰡕은 󰡔제론󰡕을 풀이한 것이나 작자를 알 수 없으며, 한사람의 저작이 아닐 것이다. 다시 何晏의 󰡔論語集解 󰡕 서문에서는 “󰡔齊論󰡕은 22편인데, 그 20편 중의 장구도 노론보다는 많다” 고 하였다. 또 “제론에는 「問王」과 「知道」라는 두 편이 󰡔노론󰡕보다 많이 있는데, 󰡔고론󰡕에도 이 두 편은 없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문왕」과 「지도」의 두 편에 대해서, 송대 晁公武(1144년전후)는 󰡔君齋讀書志󰡕에서 內聖外王을 논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청대 周彛尊(1629-1709)은 󰡔經義考󰡕에서 조공무의 설은 附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說文󰡕․󰡔初學記󰡕․󰡔文選󰡕注․󰡔太平御覽󰡕 등에 보이는 󰡔論語󰡕의 일문을 보면 옥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는 대목이 많으니, 이 「문왕」은 「問玉」의 잘못인 듯하며, 특히 篆文에 있어서는 王자와 玉자가 비슷하여 그런 착오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劉寶楠도 󰡔論語正義󰡕에서 이 설을 지지하였는데, 翟灝는 󰡔四書考異󰡕에서 “一說로 참고할 만하나, 너무 구애받아서는 안된다.” 하였다.  그리고 元대의 馬端臨은 󰡔文獻通考󰡕에서 이 두 편은 “후유가 모방해서 지은 것이어서 진짜 성인의 경문이 아닐 것” 이라고 하였다. 󰡔제논󰡕은 「문왕」․「지도」 두 편을 제외한 20편도 章과 句가 󰡔魯論󰡕보다 많다. 이 󰡔제론󰡕을 전한 사람으로는 王吉․宋畸․貢禹․五鹿充宗․庸生 등을 들기도 하고 (󰡔漢書󰡕 「藝文志」), 何晏은 王卿을 들고 있기도 하다. 이 중에도 일가를 이루어 유명했던 사람은 󰡔노론󰡕을 전한 王駿의 아버지인 왕길이라 한다. 이 󰡔제론󰡕은 󰡔노론󰡕을 전한 張禹에게로 이어져 정리되었다.
󰡔古論󰡕은 󰡔漢書󰡕 「藝文志」에 󰡔古󰡕 21편의 一家만이 실려 있다. 孔子의 옛집 벽속에서 나온 고문의 󰡔論語󰡕이다. 何晏은 󰡔論語集解󰡕의 서문에서 “노나라 恭王때 孔子의 옛 집을 궁전으로 만들려고 헐다가 󰡔古文論語󰡕를 얻었다.” 고 하였다. 공왕은 한 景帝(B.C 156-B.C141재위)의 아들이며, 이때 󰡔論語󰡕 외에도 고문의 󰡔고문상서󰡕․󰡔예기󰡕․󰡔효경󰡕 등 수십 편도 함께 발견되었다(󰡔漢書󰡕 「藝文志」). 여기에서의 고문이란 그 당시 통용되고 있던 隸書가 아니라 더 이전에 쓰이던 옛 자체로 씌어진 글임을 뜻한다.
󰡔古論󰡕은 「堯曰」편의 子張問曰이하를 따로 「子張」편으로 독립시켜 결국 「子張」편이 두 개이므로 21편이며 「문왕」과 「지도」 두 편은 없다. 고문 즉 고대문자, 蝌蚪文字이다. 󰡔齊論󰡕 󰡔魯論󰡕과 비교하면 서로 편차가 다르다. 皇侃은 󰡔論語義疏󰡕 서문에서 “󰡔古論󰡕의 편차는 「鄕黨」이 두 번째 편이고 「雍也」가 세 번째 편으로 되어 있으며 그 안의 뒤섞임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고 하였다. 漢代 桓譚(B.C ?-A.D 25경)은 󰡔新論󰡕에서 “󰡔古論󰡕과 󰡔齊論󰡕․󰡔魯論󰡕의 글이 서로 다른 것이 사백여 자가 된다” 고 하였으며, 󰡔수서󰡕 「경적지」에서도 󰡔古論󰡕이 󰡔魯論󰡕과 다른 보기를 여러 조목 들었다. 두 개의 「子張」편이 있다는 데 대해서도, 하나는 「子張問」인데 「子張」과 제목이 비슷하여 두 개의 「子張」편이 있다고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며(宋 金履祥 󰡔論語集注考證󰡕, 劉寶楠 󰡔論語正義󰡕), 󰡔漢書󰡕의 魏나라 如淳의 주에서는 다른 한편은 편명을 「從政」이라 했었다고 하지만 모두 확증은 없다. 이 󰡔古論󰡕을 전했던 사람에 대하여, 何晏은 “󰡔古論󰡕은 오직 박사였던 孔安國(B.C156?-B.C 74?)이 그 훈해를 하였는데 전하지 않는다. 順帝(126-144재위) 때 南郡太守 馬融(79-166)도 그 訓說을 했었다.”고 설명하였다.
공안국은 孔子의 11세손으로, 武帝(B.C140-B.C87재위)때의 박사였다. 그는 󰡔論語󰡕뿐만이 아니라 孔子의 옛집 벽속에서 나온 󰡔고문상서󰡕․󰡔예기󰡕․󰡔효경󰡕까지도 후세에 전하였다(󰡔漢書󰡕 「藝文志」). 그러나 그의 󰡔論語󰡕훈해는 일찍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漢書󰡕 「藝文志」에도 실리지 않고 있으니 어떤 것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馬融은 후한 桓帝(147-167재위)때의 학자로 󰡔論語󰡕 이외에도 󰡔효경󰡕․󰡔시경󰡕․󰡔역경󰡕․󰡔삼례󰡕․󰡔상서󰡕 등에 대한 주를 썼다. 그의 학문은 대체로 고문을 숭상하였으며, 鄭玄도 그에게서 󰡔고론󰡕을 공부하였다 한다.(󰡔後漢書󰡕 馬融전)
이상과 같이 漢代에는 󰡔魯論󰡕과 󰡔齊論󰡕․󰡔古論󰡕의 세 가지 󰡔論語󰡕가 세상에 전해져 제각기 통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스승의 학문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는 이른 바 師法이 비교적 엄격히 지켜지던 시대라서, 이들 세 가지 󰡔論語󰡕 판본은 각각 이동을 지닌 채, 비교연구를 통한 종합이 이루어지지 않고, 제각기 세상에 통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제․노의 구별, 고문과 금문의 차이, 원문의 다과와 이동 등이 생겨난 것은 결국 󰡔論語󰡕가 찬정된 이후 傳誦되는 동안에 후인들에 의해 원문에 가감이 생겨지고 여러 가지 혼란이 초래되었기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와서는 육덕명의 󰡔경전석문󰡕 같은 책 덕분에 이들 세 가지 󰡔論語󰡕의 문자상의 이동을 어느 정도 엿볼 수는 있으나, 온전한 이들 판본은 한 가지도 전하여지지 않으므로 그 차이를 확인할 길은 없다.
그 후 西漢 元․成帝(B.C 32- B.C 7재위)때의 인물인 張禹(?-B.C 5)가 나와 󰡔論語󰡕 판본에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장우는 본시 夏候建에게서 배운 󰡔魯論󰡕을 바탕으로 하고 庸生과 王吉에게서 배운 󰡔齊論󰡕으로써 보정하여 그 중의 좋은 점을 취해서 자기 나름의 󰡔論語󰡕 정본을 만들어 냈다. 󰡔수서󰡕「경적지」에 의하면 󰡔장후론󰡕은 󰡔제론󰡕의 「문왕」․「지도」 두 편을 떼어버리고 󰡔노론󰡕과 같이 20편으로 교정한 것이라 하는데 세상에서는 “󰡔論語󰡕를 공부하려면, 󰡔장후론󰡕을 읽어라.欲爲論, 念張文”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그의 판본이 존중되고 유행하여 다른 판본이 자취를 감추게 될 정도였다 한다. 그가 安昌候를 봉해진데 따라 그가 정착시킨 것을 󰡔張候論󰡕이라 한다. 이것이 크게 유행하여 후한초에 저명한 학자였던 周氏와 包咸의 장구가 나왔을 정도이다(󰡔漢書󰡕 「장우전」). 그러나 그는 󰡔古論󰡕까지는 참조를 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장후론󰡕 역시 전하지 않으며, 세 가지 판본의 종합은 후한의 대학자인 鄭玄에 이르러 이루어졌다. 何晏의 󰡔論語集解 󰡕서문에서는 “한말에 大司農 鄭玄이 이전까지 전해오던 󰡔魯論󰡕의 편장을 바탕으로 󰡔齊論󰡕․󰡔古論󰡕을 참고하여 그 주를 지었다.” 하였고, 󰡔수서󰡕 「경적지」에서는 “한말에 鄭玄은 󰡔장후론󰡕을 근본으로 하고, 󰡔제론󰡕․󰡔고론󰡕을 참고하여 그 주를 지었다.”하였다. 그리고 육덕명은 󰡔경전석문󰡕 서록에서 “鄭玄은 󰡔노론󰡕의 張․包․周의 편장을 바탕으로 하고, 󰡔제론󰡕․󰡔고론󰡕을 참고하였다” 하고, 그 「音義」에서는 “鄭玄은 周氏의 판본을 교정하였는데, 󰡔제론󰡕․󰡔고론󰡕의 글로써 바로 잡은 것이 五十事나 된다.” 하였다. 鄭玄의 󰡔論語󰡕교정에 대하여는 학자들의 의견이 구구하나, 그가 이전까지 전해오던 󰡔노론󰡕․󰡔제론󰡕․󰡔고론󰡕은 물론 󰡔장후론󰡕과 包咸․周氏가 썼다는 장구까지도 모두 참고하고, 그 교정의 바탕은 󰡔魯論󰡕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통용되는 󰡔論語󰡕의 판본은 여기에서 종합되었다. 뒤에는 鄭玄의 注만이 전하고 󰡔제론󰡕과 󰡔고론󰡕은 모두 없어졌다. 그러나 鄭玄의 이 󰡔論語󰡕주도 완전한 전본은 없으며, 청대 宋翔鳳(1776-1860)의 輯佚書, 일본 京都의 本願寺 등에 약간의 단편이 보존되고 있다. 또한 프랑스인 뻬리오(Paul Pelliot)가 1908년 중국 甘肅省 敦煌縣 千佛洞의 石室에서 가져간 문권 속에는 정주󰡔論語󰡕의 「述而」․「泰伯」․「子罕」․「鄕黨」 네 편의 抄本이 있다고 한다. 그 뒤로 위나라의 陳羣․王肅․周生烈 등도 각각 󰡔論語󰡕의 義說을 지었다 하나(何晏 集解 서)모두 전하지 않는다..
현전하는 󰡔論語󰡕의 가장 오랜 판본은 何晏 등이 이전 학자들의 󰡔論語󰡕 해석을 집대성한 󰡔論語集解󰡕이다. 이것이 세 가지 󰡔論語󰡕와 얼마나 다른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중 󰡔魯論󰡕이 지금 전하는 󰡔論語󰡕의 기본 바탕이 된 것임은 틀림없으며, 이로써 현전하는 󰡔論語󰡕가 󰡔魯論󰡕에서 나왔다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論語󰡕를 통독해 보면 孔子의 응답이 있어야 할 곳에 孔子의 말이 없는 곳도 있고, 孔子 내지 공문제자와 무관한 부분도 있고, 전후의 문장이 어울리지 않는 대문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대체로 착간과 탈오, 독자 부기의 혼입 등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선진시대의 전적으로 이 정도의 혼란이 생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역대 학자들의 노력으로 󰡔論語󰡕가 그 본래의 면목을 오늘날에 전해지는 정도로라도 보존될 수 있었다는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