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소소한 행복 2019. 3. 13. 16:51

명심보감 - 선행에 대한 글 (繼善篇)

子曰 爲善者는 天報之以福하고 爲不善者는 天報之以禍니라
공자(孔子)가 말하였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으로 갚아주고, 착하지 않은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으로 갚는다.”

漢昭烈이 將終에 勅後主曰 勿以善小而不爲하고 勿以惡小而爲之하라
한(漢)나라의 소열황제(昭烈皇帝)가 장차 죽으려 할 때 후주(後主)에게 경계하여 말하였다. “작은 선이라고 해서 하지 않아서는 안되며 작은 악이라고 해서 하지 말라.”

莊子曰 一日不念善이면 諸惡이 皆自起니라
장자(莊子)가 말하였다. “하루라도 선(善)을 생각지 않으면 모든 악(惡)이 저절로 일어난다.”

太公曰 見善如渴하고 聞惡如聾하라 又曰 善事란 須貪하고 惡事란 莫樂하라
태공(太公)이 말하였다. “착한 일을 보거든 목마른 듯이 하며, 악한 말을 듣거든 귀머거리처럼 하라” 또 “착한 일이란 모름지기 탐내야 하며, 악한 일이란 즐기지 말라.”

馬援曰 終身行善이라도 善猶不足이요 一日行惡이라도 惡自有餘니라
마원(馬援)이 말하였다. “몸을 마치도록 선(善)을 행하더라도 선은 그래도 부족하고, 단 하루 악(惡)을 행하여도 악은 저절로 남음이 있다.”

司馬溫公曰 積金以遺子孫이라도 未必子孫이 能盡守요 積書以遺子孫이라도 未必子孫이 能盡讀이니 不如積陰德於冥冥之中하여 以爲子孫之計也니라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였다. “돈을 모아 자손에게 남겨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지킬 수는 없으며, 책을 모아서 자손에게 남겨 준다 하여도 자손이 반드시 다 읽는다고 볼 수 없다. 남모르는 가운데 덕(德)을 쌓아서 자손을 위한 계교를 하느니만 같지 못하다.”

景行錄曰 恩義를 廣施하라 人生何處不相逢이랴 讐怨을 莫結하라 路逢狹處면 難回避니라
≪경행록(景行錄)≫에 말하였다.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어라. 사람이 어느 곳에 살든 서로 만나지 않으랴?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마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만나면 회피하기 어렵다.”

莊子曰 於我善者도 我亦善之하고 於我惡者도 我亦善之니라 我旣於人에 無惡이면 人能於我에 無惡哉인저
장자가 말하였다. “나에게 착하게 하는 자에게도 나 또한 착하게 하고, 나에게 악하게 하는 자에게도 나 또한 착하게 할 것이다. 내가 이미 남에게 악하게 함이 없으면, 남도 나에게 악하게 함이 없다.”

東嶽聖帝垂訓曰 一日行善이면 福雖未至나 禍自遠矣요 一日行惡이면 禍雖未至나 福自遠矣니 行善之人은 如春園之草하여 不見其長이라도 日有所增하고 行惡之人은 如磨刀之石하여 不見其損이라도 日有所虧니라
≪동악성제수훈(東嶽聖帝垂訓)≫에 말하였다. “하루 선한 일을 행하면 복은 비록 이르지 아니하나 화[재앙]는 저절로 멀어질 것이요, 하루 악한 일을 행하면 화는 비록 이르지 아니하나 복은 저절로 멀어질 것이다.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은 봄 동산의 풀과 같아서 그 자라는 것을 보지 못하나 날로 더해지는 것이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 갈려 닳아 없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나 날로 이지러짐이 있다.”

子曰 見善如不及하고 見不善如探湯하라
공자가 말하였다. “선함을 보거든 미치지 못할 것과 같이 하고, 선하지 않음을 보거든 끓는 물을 만지는 것과 같이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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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소한 행복 2019. 3. 13. 16:29

論語의 편찬자에 대해서도 여러 설


子夏를 비롯한 70제자라는 설

子夏仲弓子游 등의 撰定이라는 설

曾子의 문인인 樂正子春子思의 무리라는 설

曾子有子의 문인이라는 설

閔子騫의 문인이라는 설 등이 그것이다.

漢代劉向(B.C 77-B.C 6)은 그의 󰡔別錄󰡕에서, 孔子의 제자들이 훌륭한 말씀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漢書󰡕 「藝文志와 후한의 趙岐(?-201)󰡔孟子題辭󰡕, 󰡔隋書󰡕「經籍志, 양나라 劉勰(?-473)󰡔文心雕龍󰡕 등이 모두 그의 견해를 따랐다. 皇侃󰡔論語義疏󰡕에서 孔子 사후 70제자가 함께 찬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子夏仲弓子游 등의 撰定이라는 설은 鄭玄󰡔論語󰡕에서이다. 당대 육덕명은 󰡔經典釋文󰡕 「敍錄에서 󰡔論語󰡕는 중궁과 자하가 찬정한 것이다라는 鄭玄의 설을 인용하고 있다. 邢昺은 이 鄭玄의 말에 자유 두 글자가 빠졌다고 했다. , 邢昺鄭玄의 말은 본래 󰡔論語󰡕는 중궁과 자유와 자하가 찬정한 것이다.”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晉代傅休(217-278)중궁의 무리가 孔子의 말을 추론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송대 陸九淵(1139-1192) 등이 鄭玄의 설을 받아들이고 있다. 중궁과 자유자하는 모두 󰡔論語󰡕 「先進편에 보이는 四科十哲 속에 들어 있고, 특히 자유와 자하는 문학에 뛰어났다 했으니, 이들이 󰡔論語󰡕의 형성과 전혀 무관할 리는 없을 것이다.

세 번째의 설로서, 악정자춘과 자사의 무리라는 설은 당대 柳宗元(773-819)이 제시하였다. 그는 󰡔論語辨󰡕 「상편에서,

누가 물었다. “儒者들이 󰡔論語󰡕孔子의 제자가 기록했다는데 맞습니까?”

대답하기를 아니야. 孔子제자 중에 증삼이 가장 젊어서 孔子보다 46세 연하야. 증자는 늙어 죽었는데 󰡔論語󰡕에 증자의 죽음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 그러니 孔子와는 시대가 매우 멀어. 증자가 죽을 때 孔子 제자는 거의 생존한 사람이 없었을 것이야. 내 생각에는 증자의 제자가 기록한 것 같아. 왜냐고? 이 책에서 제자는 반드시 로 썼는데 유독 증자유자만 그렇지 않단 말야. 이렇게 말한 것은 제자가 호칭했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유자는 왜 라고 했습니까?”

孔子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제자들이 유약이 孔子와 닮았다고 해서 스승으로 섬겼지. 그 뒤 사람들의 물음에 잘 대답을 못해서 쫓아내 버렸지. 그러니 원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있었어. 지금 기록된 것에 의하면 증자만이 제일 뒤에 죽었거든. 내가 그래서 알았지. 아마 樂正子春이나 子思의 무리가 기록했을거야.”

라고 하여, 증삼이 임종할 때의 말이 󰡔論語󰡕의 말에 나와 있으므로 증삼이 󰡔論語󰡕를 찬정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나 그를 로 칭한 것으로 보아 󰡔論語󰡕는 증삼의 문도인 악정자춘과 자사의 손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했다. 孔子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을 雜記하여 놓은 것들도 있었을 것이나 그 책을 이룩한 것은 증자의 제자들이라는 것이다. 유약을 有子로 칭한 것은 다른 제자들이 그를 孔子 섬기듯이 섬기라고까지 존경하였으므로 특별히 로 불렀을 뿐이고 그 제자가 󰡔論語󰡕의 찬정사업에 참여한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한편, 朱熹(1130-1200)󰡔論語序說󰡕에서 정자(程頤)의 말이라 하면서, “ 󰡔論語󰡕는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니, 이 두 사람만이 󰡔論語󰡕에서 孔子와 함께 를 붙여 부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청의 姚鼐같은 사람은 증삼과 유약을 󰡔論語󰡕에서 로 칭한 것은 孔門에서 그렇게 불러오던 것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고 따로 경중을 두고 그렇게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論語󰡕의 내용 중에는 물론 孔子의 제자가 직접 孔子의 말을 듣고 손수 기록했던 것들이 들어있을 것이나 󰡔論語󰡕 전체의 편성은 孔子의 제자가 다시 전한 제자 내지 그 이후의 선비들에 의해 이루어 졌을 것이다.

민자건의 문인이 편찬자라는 설은 남송의 洪邁(1129-1202)이다. 그는 󰡔容齋隨筆󰡕에서, 孔子가 제자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顔回冉雍같은 高弟도 모두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 오직 閔損만은 子騫이라는 자로 부르고 있으므로, 󰡔論語󰡕閔氏에게서 나온 책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명나라의 張燧 등 이 설을 따른 학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밖에 청말 章學誠(1738-1801)󰡔文史通義󰡕 「詩敎上에서 󰡔論語󰡕에는 증자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일찍이 吳起가 증자를 스승으로 섬겼으니, 증자의 죽음은 전국 초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論語󰡕는 전국시대에 이루어진 것이 확실하다.” 라고 하였다. 󰡔예기󰡕 「檀弓편에 의하면 자하가 西河에 살면서 제자를 가르칠 때 증자가 아직 생존해 있었다. 錢穆先秦諸子繫年에 보면 이 때 자하가 63세였다. 증자는 자하보다 2살 연하이므로 이 때 61세이다. 孔子가 죽을 때 증자는 27세였다. 그런데 󰡔論語󰡕에는 증자가 임종할 때의 일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 것으로 󰡔論語󰡕의 편성은 아무리 빨라도 孔子가 죽은 후 30년이 지난 후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증자에게 병이 있어서 孟敬子가 위문하였다.” 는 말로도 증명할 수 있다. 孟敬子의 이름은 으로 孟武伯의 아들이다. 孟武伯魯哀公 27(孔子 사후 11)에도 생존해 있었다(애공 27년의 좌전에 나옴).그러니, 그 아들의 죽음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이다. 그리고 󰡔論語󰡕는 벌써 맹경자를 시호로 부르고 있다. 그렇다면 章學誠󰡔論語󰡕가 전국시대에 이루어졌다는 말은 믿음직한 증거가 있다.

이밖에도 많은 이설이 있다. 어쨌거나 󰡔論語󰡕孔子가 직접 쓴 글이 아니고 그의 사후에 기록한 것임은 분명하다. 한편, 󰡔論語󰡕의 내용에 따라 작자를 설명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論語󰡕 20편이 그 앞 10편과 뒤 10편의 내용상 성격에 차이가 있으므로 한 시기에 한 인물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청대 崔述(1740-1816)󰡔洙泗考信錄󰡕󰡔論語餘說󰡕(모두 東璧遺書에 실림)에서 󰡔論語󰡕의 편자에 대해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 󰡔論語󰡕 20편 중 앞 10편만이 유자와 증자의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므로 孔子와의 시대가 가깝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서 禮制가 분명하며, 10편은 후세 사람들이 續記한 것이므로 세도가들이 날뛰던 시대의 영향을 받아 제도에 관한 말에 이동이 생겼다는 것이다. 뒤의 10편에서도 특히 후의 5편은 子張편에는 오로지 제자들의 말만이 기록되어있고, 나머지 季氏」․「陽貨」․「微子」․「堯曰네편에는 의심스런 대목들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특히 이 끝머리 5편은 앞 15편과 문체가 두드러지게 다르고, 앞에서는 孔子의 말을 모두 자왈로 인용하고 있는데 비하여 孔子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고, 孔子를 부를 적에도 夫子이외에 仲尼라 하기도 하고, 孔丘라 호칭한 곳조차도 있다. 따라서 끝머리 5편은 더욱 후세에 붙여진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論語󰡕는 앞 10편이 정편이라면, 10편중의 다시 앞머리 5편은 속편의 성격을 지녔고 끝머리 5편은 잡편의 성격을 지녔다고 본 것이라 하겠다.

근세의 학자들은 각자의 입장에 차이가 있기는 하나 최술의 견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이는 없다. 그러니 󰡔論語󰡕란 한때 한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진 책은 결코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이다. 孔子가 죽은 뒤 그의 제자들이 기록을 모아 이루어 놓았던 것을 근거로 하여, 전국시대를 통하여 여러 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서 보태어지고 다듬어진 끝에, 우리가 지금 보는 것과 같은 󰡔論語󰡕漢代에 완성된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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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소한 행복 2019. 3. 13. 15:46

공자의 가계는~



공자의 가계는 확실치 않다. 그의 족보가 左傳에 나오기는 하지만 공자가 商王朝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은 믿기 어렵다. 그는 나라 諏邑에서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으며 형과 조카딸 그리고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고아였다는 주장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부인에 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어 후세의 전설에 이혼했다는 설도 있다.

공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미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교육도 받았고 음악과 궁술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조상은 하급이나마 귀족이 아니었나 한다. 공자는 젊은 시절 창고지기나 목장 관리를 하며 생계를 이었으나 이 때의 고생은 그에게 일반 백성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했다. 이는 후에 신분을 초월한, 능력에 의한 기회균등을 주장하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공자는 아첨할 줄을 몰랐으며 정치가로서보다는 타고난 철학자요 교사로서의 재능을 가졌다. 하지만 공자의 꿈은 훌륭한 철학자나 유명한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명성을 얻고 인류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대부분 관료가 됨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관직을 얻고자 열망했다. 하지만 관직을 얻지 못함으로서 그는 오히려 그는 당시 빈약했던 학문 연구와 교육, 그리고 궁전의 의례를 연구할 시간과 지적인 평정을 가질 수 있었다.

공자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학식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지만 이것은 그가 고전을 많이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고전 중에는 그 때 아직 저술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었고 책도 귀해서 끽해야 대나무에 글을 써서 끈으로 묶은 이 책의 역할을 대신했다. 물론 시경을 비롯해 책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문헌을 인용할 때 극히 겸손했고 다른 사람이 의견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그가 고전의 연구를 통한 고대 질서의 부활을 꿈꾸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많이 다른 것이다.

주왕조의 영광을 공자가 찬양한 곳이 논어에 가끔 보이는데 이것은 사실 공자가 주나라 시대를 그리워 했다기 보다는 제후가 난립하는 세상에서 이들을 평정할 강력한 하나의 왕조의 탄생을 기대하고 를 그 하나의 모델로서 상정한 것이 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제후가 난립하는 상황에선 정상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국가가 공자 생존 중에 탄생했다면 그는 아마 격렬한 어구로 이 위대한 단일 왕조의 역사적 숙제를 강조했을 것이다. 그것은 신분 귀족제의 폐지와 실력과 인격에 기초한 관리 선발이다. 궁극적으로는 왕도 이런 원리에 의해 백성 가운데서 선발할 것을 생각했겠지만 공자는 지나친 이상향 주장으로 현실적인 성취마저도 잃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이점에 관해서는 10장 개혁가 편에서 다시 다룬다.

사실 공자는 세력 있는 지위를 상속받지도 못하였고 권력자에게 아첨을 할만큼 권모술수에 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을 세상에 펼칠 만한 위치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점은 공자가 영원한 이상가로 남는데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공자는 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고 국사를 좌우했다고 하는데 와의 회담에서 기지를 발휘해 노공을 납치하려는 제의 계획은 좌절되고 빼앗긴 영토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논어나 맹자엔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좌전에만 있는 것을 볼 때 조작이라고 생각된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공자는 큰 공을 세운 것이 되고 높은 벼슬까지도 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공자에 대한 거짓 전설은 자신의 우상을 자신의 이상향에 투영하려는 후세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마징가 제트나 슈퍼맨을 우상으로 삼고 이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어린아이들의 심리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함은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野人으로서 인류의 갈 길을 밝힌 점에 있는 것이다. 만약 모든 훌륭한 사상이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면 인류는 자신의 평범함에 슬퍼하며 학문의 연구는 위인에게 맡기고 머리칼이나 뜯었을지 모른다. 잠시 이야기가 샜지만 어쨋든 공자는 관직을 바라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자신을 기용할 군주를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공자는 에 있을 때와 여행 중에 딱 두번 벼슬을 제의 받았는데 두 번 다 그리 정통성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한번은 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에서 온 제의였고 또 한번은 의 가신이 성을 점령하고 공자를 초청한 것이었다. 두번 다 공자는 제의를 수락하려 하였으나 제자인 子路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동양의 대학자가 작은 읍, 그것도 반란군의 관리가 되고 싶어하였다는 사실로 살아 있을 때 그가 얼마나 이상을 펴고 싶어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 얼마나 현실에서 무시당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론 아무 성과도 없는 이 여행은 공자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가장 큰 사건이 되었다. 앞에 먼저 말했지만 이 여행으로 그가 얼마나 평범하고도 무시 받던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으며 또 그가 얼마나 이론의 실현을 위해 절치부심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국에 돌아 온 공자는 이웃 국의 어린 임금이 귀족인 에 의해 살해 된 사건을 접하고 정부에 군사 개입을 간언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묵살되고 마침 아들과 가장 아끼는 제자 顔回의 죽음을 맞게 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자로는 자신의 군주를 지키다가 살해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공자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구나!” 하고 비통해 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479년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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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6장 ~ 9장

老子 6- 도는 만물의 어머니다

 

谷神不死, 是謂玄牝, 玄牝之門, 是謂天地根, 綿綿若存, 用之不勤.

곡신불사, 시위현빈, 현빈지문, 시위천지근, 면면약존, 용지불근.

 

 

도는 텅 빈 산골짜기의 신과 같고 그 신은 결코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근본이라 한다. 그 뿌리는 끊임없이 존재하는 것 같고 천지만물이 아무리 써도 지쳐 없어지지 않는다.

 

老子 7- 사심을 버림으로 존재하게 된다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천장지구, 천지소이능장차구자, 이기불자생, 고능장생,

是以聖人 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시이성인 후기신이신선, 외기신이신존,

非以其無私邪, 故能成其私.

비이기무사사, 고능성기사.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오래다. 천지가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살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살 수 있다. 성인은 자신을 뒤에 머물게 함으로 앞서고 자신의 이익을 떠나 잊으므로 실은 자신이 거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없기 때문이다. 사심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老子 8-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상선약수. 수선이만물이부쟁, 처중인지소악.

故幾於道.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고기어도. 거선지, 심선연, 여선인, 언선신,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夫唯不爭, 故無尤.

정선치, 사선능. 동선시. 부유부쟁, 고무우.

 

최상의 선은 물과 같은 것이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면서도 다투는 일이 없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거의 가까운 것이다. 사는 곳으로는 땅 위가 좋고, 마음은 못처럼 깊은 것이 좋고, 벗은 어진 사람이 좋고, 말은 믿음이 있어야 좋고, 정치나 법률은 세상이 잘 다스려지는 것이 좋고, 일을 처리하는 데에는 능숙한 것이 좋고, 행동은 적당한 시기를 아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물은 이에 제일 가깝다.

 

老子 9-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 한다

 

持而盈之, 不如其已. 而銳之, 不可長保.

지이영지, 불여기이. 취이예지, 불가장보.

金玉萬堂, 莫之能守. 富貴而驕, 自遺其咎.

금옥만당, 막지능수. 부귀이교, 자유기구.

功遂身退, 天之道.

공수신퇴, 천지도.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무리해서 계속 유지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두들겨 날카롭게 만든 칼은 오래가지 못하고 금은 보화를 집안에 가득 쌓아둔다고 해서 그것을 유지해 나갈 수는 없다. 부귀하여 교만하게 되면 스스로 화를 부르게 될 것이다. 일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는 것이 천도의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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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소한 행복 2019. 3. 9. 19:48

명심보감 (마음으로 공부하는 길)
1. 한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 날의 근심을 면할 수 있다.
2. 앞으로 올 일을 알고 싶다면 이미 지나간 일을 살펴보라.
3. 밝은 거울에 모습을 비추어 볼 수 있듯이, 지나간 일을 가지고 현재를 알 수 있다.
4. 한 점의 불씨가 넓은 들을 태우듯이, 잘못된 말 한(반)마디가 평생 쌓아 온 덕을 무너뜨린다
5. 옷을 입으면 옷을 만든 사람의 수고로움을 생각하고, 하루 세 끼 밥을 먹을 때에는 농부의 수고를 생각할 것이다.
6. 옥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을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배우지 않는다면 무엇이 옳은 일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명심보감 (열심히 공부하는 길)

1. 사람이 올바른 일을 배워 알지 않으면, 말이나 소가 옷을 입는 것과 같다.
2. 집안이 가난하다고 해서 배움을 그쳐서도 안 되고, 집안이 부유하다고 해서 배움을 게을리해서도 안 된다.
3. 가난하더라도 열심히 공부하면 성공할 수 있고, 부유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면 이름을 더욱 빛낼 수 있다.
4. 배움이란, 몸의 보배이고, 배운 사람은 세상의 보배이다.
5. 일생의 성공은 어릴 때에 달려 있고, 일 년의 성공은 봄에 달려 있고, 하루의 성공은 새벽에 달려 있다.
6. 어려서 배우지 아니하면 늙은 뒤에 아는 것이 없게 되고, 봄에 농사를 짓지 아니하면 가을에 거두어들일 것이 없게 되고, 아침 일찍 일어나지 않으면 그 날 할 일을 다하지 못하게 된다.
7. 오늘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서 내일이 있다고 말하지 말며, 올해 열심히 배우지 않으면서 내년이 있다고 말하지 말라.
8. 날과 달은 흐르는 것이며, 세월은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이 아니다.
9.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짧은 시간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10. 연못가의 풀은 봄 꿈에서 깨지 않았는데, 어느 새 섬돌 앞 오동나무는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11. 젊을 때는 다시 오지 아니하고, 하루에 새벽이 두 번 오지 않는다. 젊었을 때에 배우기를 힘써야 한다. 세월은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12.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지 않으면 천 리를 갈 수 없고, 작은 시내가 모이지 않으면 강물을 이룰 수 없다.



명심보감 (사람을 사귀는 바른 길)

1. 착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향기로운 난초가 가득한 방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 되면 그 향기를 맡지 못하더라도 곧 그 사람과 같아지게 되고, 좋지 못한 사람과 함께 지내면 비린내 나는 생선 가게에 들어간 것과 같아서 오래 되면 그 냄새를 맡지 못하더라도 또 그 사람처럼 될 것이다.(공자)
2. 붉은 것을 지니고 있으면 붉어지고, 검은 것을 지니고 있으면 검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주변 사람을 고르는 일을 신중히 한다.
3.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길을 가면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아서 비록 옷이 젖지는 않더라도 때때로 윤이 나고, 배우지 못한 사람과 길을 가면 화장실에 앉아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옷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아도 때때로 나쁜 냄새가 난다. (공자)
4.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은 심지 말며, 의리 없는 친구는 사귀지 말라.
5. 군자의 사귐은 맑기가 물과 같고, 소인의 사귐은 달기가 단술과 같다.
6. 길이 멀어야 말의 힘을 알 수 있고, 사귄 지 오래 되어야 사람 마음을 알 수 있다.
7. 호랑이의 겉모양은 그릴 수 있더라도 몸 속의 뼈를 그릴 수 없듯이, 사람을 사귈 때에 얼굴은 알 수 있지만 마음을 알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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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語석명

 

그런데 이 󰡔論語󰡕의 제명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후한의 鄭玄,

대답하여 진술하는 것을 다 라고 한다. 이 책에 실려있는 것은 다 仲尼가 제자 및 당시 사람에게 응답한 말이기 때문에 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아래에 있는 것은, 반드시 論撰을 거친 후에 그것들을 실어서 망령되고 그릇된 것이 아님을 나타낸 것이다.” 라고 했다.

 

나라의 皇侃(488-545)󰡔論語義疏󰡕의 서문에서,

 

자의 풀이에는, 첫째 음을 취하여 이라고 하는 것과, 둘째 글자만을 취하여 으로 보는 것, 셋째 이 모두 같은 뜻이라는 것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하였다.

첫째의 경우는 다시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먼저 의 뜻으로, 이 책이 사건과 뜻이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의 뜻으로 만 가지 이치가 다 담겨 있다는 것이요, 셋째는 으로 고금을 경륜했다는 것이요, 넷째는 으로 온갖 뜻이 다 갖추어져 마치 수레바퀴처럼 원전함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다음으로 이라 풀이하는 것은, 문인들이 자세히 토론하여 기록했으므로 이라 했다는 주장이며,‘이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나라와 中原지방의 음이 다르고 남쪽과 북쪽의 말이 다른데서 온 것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남쪽 사람들은 일을 한다(질서 있게 한다)’는 것을 일을 한다고 말하고, 북쪽 사람들은 일을 한다.(논의한다)’는 것을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음과 글자가 같지 않다 하더라도 뜻은 모두 같은 것이다.

자에 대해서는, ‘란 논란에 대하여 대답하여 설명하는 것을 말한다. 󰡔詩經󰡕毛傳에서도 곧바로 말하는 것을 이라 하고 논란하는 것을 라 한다.” 하였다. 󰡔周禮󰡕鄭玄의 주에는 말하기를 시작하는 말을 이라 하고, 대답하여 설명하는 것을 라 한다.” 이 책의 내용이 이미 논란에 대하여 대답하여 설명하는 것이므로 으로 그 이름을 삼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름하여 󰡔論語󰡕라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상이 한대에서 육조시대에 이르는 여러 학자들의 의견이며, 당대의 陸德明󰡔論語音義󰡕, 송대 邢昺󰡔論語注疏󰡕 등이 이러한 해설을 따른다. 오늘날 󰡔論語󰡕라는 자의에 대해서는 대체로 󰡔漢書󰡕 「藝文志의 경우처럼 孔子 사후 그 언행을 제자들이 논의하여 편찬한 것이라는 의견과, 공문의 스승과 제자가 글뜻을 토론한 것이라고 하는 의견의 두 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元初何異孫󰡔論語問對󰡕에서, “이는 공문의 스승과 제자가 토론한 언어이다. 제자가 스승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있고, 스승이 제자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 있고, 제자들 자신이 서로 문답한 것이 있고, 그때 사람들이 서로 얘기한 것이 있고, 신하가 임금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 있고, 스승과 제자가 大夫의 물음에 대답한 것이 있는데, 모두 글뜻을 토론하는 방법이었으며, 그래서 이것을 󰡔論語󰡕라 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후자의 견해를 밝혔다. 청대의 袁枚(1716-1797)󰡔小倉山房文集󰡕 「論語解에서 󰡔論語󰡕란 책은 모름지기 제명을 붙인 뜻을 알아야 한다. ‘이란 의론의 뜻이며 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學而로부터 끝 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람들과 의론한 말이라는 것이다.”라 하여, 하이손의 의견에 따랐으며, 趙翼(1727-1814)󰡔陔餘叢考󰡕에서 전국시대에서 한초에 이르는 사람들의 책에는 孔子의 남긴 말이나 지난 일들이 실려 있는 것이 매우 많으며, 󰡔論語󰡕에 기록되어 있는 것도 본시 이런 기록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의 제유들이 토론하여 찬정하고 비로소 이것을 󰡔論語󰡕라 한 것이다. ‘란 성인의 남긴 말을 뜻하며, ‘이란 제유들의 토론을 뜻한다.” 고 하여 󰡔漢書󰡕 「藝文志의 견해를 따랐다.

그런데 劉寶楠(1791-1855)󰡔論語正義󰡕를 보면 앞머리의 學而라는 편명의 해설에서는 邢昺이 소에서 제자들이 논찬했을 적에 󰡔論語󰡕로서 이 책의 이름을 삼았다.”고 한 말을 인용한 뒤에, 자기 의견으로 孔子시대에 여러 제자들이 언행을 撰記하여 각자 편을 이룩하였으니, 한사람의 손에 나온 것이 아니다.”고 하면서, 대체로 󰡔漢書󰡕 「藝文志의 방향을 따르는 듯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끝머리 󰡔論語󰡕의 해설에서는 하이손의 말을 인용한 뒤에, 하이손의 설이 󰡔漢書󰡕 「藝文志의 설보다 낫다고 하고 있다. 이는 劉寶楠의 견해가 왔다갔다한 것이 아니라, 보는 방향에 따라 두 가지 설을 다 취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論語󰡕孔子와 그의 제자들이 토론한 말을 기록한 것이기도 하지만, 후세에 그의 제자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차례 논찬을 하여 이룩하여 놓은 것임을 뜻하기도 한다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모아 가지고 논찬했다든지 논찬을 거친 후에 그것들을 실었다든지 하는 것으로 대체로 󰡔論語󰡕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邪正을 가려내는 뜻으로 쓰인 말로 본 것이다. 󰡔論語󰡕 이외에도 孔子의 언행에 관한 기사는 󰡔禮記󰡕․󰡔左傳󰡕 같은 유가의 경전과 각종위서를 비롯하여 󰡔莊子󰡕․󰡔列子󰡕․󰡔呂氏春秋󰡕 등 제자서와 󰡔淮南子󰡕․󰡔說苑󰡕․󰡔新書󰡕 등 한대 제가서 등에 적지 않게 있다. 그러한 기사들은 말하자면 논찬을 겪지 않은 것들이어서 그 중에는 허황한 것들도 들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論語󰡕에 들어 있지 않은 孔子에 관한 기사도 여러 가지 의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수집 정리작업도 행해졌다. 孫星衍集錄󰡔孔子集語󰡕 17권이 가장 잘 정리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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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소한 행복 2019. 3. 9. 19:37

공자시대2-

공자를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공자 시대의 중국은 역사의 전환점에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사실상 기원전 14세기의 왕조에서 시작되는데 문화가 많이 발전해 있던 이 나라는 기원전 1122년에 서쪽 변경에서 침입한 이민족 연합에게 정복되고 말았다. 이 이민족 연합을 이끌고 있는 것은 족이었고 그들은 왕조를 건설했다. 왕조에 비해 문화가 많이 뒤떨어져 있던 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문화적 역량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할 수 없이 친척과 정복사업에 협력한 다른 부족에게 영토를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왕조 내의 평화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영토를 맘대로 지배하는 봉건제도가 발전했다.

그러나 가 마치 이상향의 국가처럼 묘사된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주조된 청동기 명문을 보면 제후들은 다른 이민족의 침략에 늘 직면해 있었고 이는 제후간의 결속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피지배민을 회유하기 위해 지나친 억압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편으로 사용 된 것이 자신들의 정복을 정당화하는 선전이었다. , 이전의 왕조인 이 처음과는 달리 나중에 폭군을 냈음을 지적하고 자신들의 정복은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천명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중에 중국에서 혁명권이 나오게 만든 요인이었다.

해가 갈수록 제후들은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따라 전쟁이 빈번해졌고 공자가 태어나기 200년전인 기원전 771년엔 봉건 제후와 이민족이 손을 잡고 西都를 공격해 는 멸망하고 東周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주는 이미 힘을 잃은 상태여서 일부 제후의 괴뢰에 불과하였다. 이에 동주국가들은 동맹 내의 가장 강력한 제후를 뽑아 라는 칭호를 주고 사실상 왕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공자가 태어날 무렵, 중국은 이미 주변 강국과 중원의 약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공자의 고향인 나라는 약소국이면서도 의 정통성을 가진 周公이 세운 나라이며 고대 문화의 보고라는 이유로 쉽게 멸망당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노나라 역시 침략에 시달렸고 이는 대부분의 중원 국가와 마찬가지였다. 이런 혼란상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힘이 없는 약소국은 정복당할 때마다 강대국과 귀신의 이름 앞에 약정을 맺었고 이 약정은 다른 강대국이 쳐들어올 때까지만 유효했다. 사회에는 점차 회의주의가 만연하고 약속보다는 힘을 중시하는 윤리가 고개를 들었다. 또 귀신의 존재마저 의심받게 되는 등 인간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은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는 고사하고 안전조차 항상 위협받았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화를 위한 전쟁에 서민들을 동원했고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사냥을 다니거나 단순한 취미로 농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유 없이 백성들을 죽이기도 했다. 형벌은 잔혹해서 에서는 발 을 자르는 벌이 너무 흔해 발을 잘린 사람들을 위한 신발을 시장에서 팔 정도였다고 한다. 충절을 지키는 신하도 있었으나 이런 사람들은 극히 적었고 근친상간이나 권력을 이용해 남의 아내를 빼앗는 일은 보편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귀족은 물론 귀족의 가신들도 자신의 군주와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길 원했기 때문에 서민들의 처지는 갈수록 궁핍해 갔다.

이러한 사회의 상황은 자기 모순을 낳았고 스스로 붕괴될 조짐을 만들었다. 여자를 맘대로 차지하게 된 귀족들은 아들들을 너무 많이 낳아 곧 모두 관직이나 영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닥쳤고 혈통이나 교육은 귀족으로 받았으나 생활은 일반 서민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 생겨났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 했고 사회를 증오했으며 전체 백성의 입장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사람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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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소한 행복 2019. 3. 8. 00:51

論語의 내용

방황하는 청년들이 생애의 지침이 될만한 책이 무엇인가고 물었을 때 타고르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책으로 󰡔論語󰡕를 권했다는 얘기가 있다. 皇侃거울은 아무리 맑아도 전반신만 비춰주지만 󰡔論語󰡕는 전신을 상하전후좌우로 비춰준다라고 말했다.

󰡔論語󰡕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孔子의 말

孔子와 제자사이의 대화

孔子와 당시 사람과의 대화

제자들의 말

제자들끼리의 대화.

이중에서도 孔子의 말씀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제자들끼리의 대화나 제자들의 말도 대개는 孔子의 말씀을 부연 설명하는 내용이다. 후한의 班固(32-92)󰡔漢書󰡕 「藝文志에서 󰡔論語󰡕孔子가 제자들과 당시 사람들에게 응답한 것과 제자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되 孔子에게서 들은 것에 관한 말들이다. 당시 제자들이 제각기 기록해 놓은 것이 있었는데, 孔子께서 돌아가신 뒤에 문인들이 서로 모아 論篡하였으므로 그것을 󰡔論語󰡕라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처럼 󰡔論語󰡕에는 孔子와 그의 집단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이 모아져 있으므로, 다른 어떤 전적보다도 孔子와 그의 유가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論語󰡕는 본시 孔子가 제정한 육경 속에는 끼지 못하던, 말하자면 본격적인 유가의 경전이 아닌데도, 예로부터 어떤 경전보다도 더 널리 읽혀오고 중시되어 온 것은 그 때문이다. 󰡔論語󰡕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를 비롯하여 일본베트남 등의 나라들에까지도 널리 읽혀졌다. 한 세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우리 나라나 일본의 공부한 사람들 중에는 󰡔論語󰡕 원문 전체를 완전히 외우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을 정도이다. 지금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거의 온 세계에서 읽혀지고 있는 책이 되었으니, 유가의 경전 중에서 가장 세계적인, 온 인류의 고전으로 화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論語󰡕는 도합 20편의 글로 이루어져 있는데, 각 편의 제명은 그 편의 첫귀절에서 적당히 두세 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따라서 대체로 각편의 제명은 그편의 내용과 큰 관련이 없을 뿐더러, 심지어는 첫머리 學而편처럼 구체적인 뜻을 이루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은 󰡔論語󰡕 이외에도 󰡔詩經󰡕 등 중국의 옛 전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命題法이다.

󰡔論語󰡕는 모두 20편으로 나뉘어져 있다. 학이」․「위정」․「팔일」․「이인」․「공야장」․「옹야」․「술이」․「태백」․「자한」․「향당」․「선진」․「안연」․「자로」․「헌문」․「위령공」․「계씨」․「양화」․「미자」․「자장」․「요왈이 그것이다. 이것은 모두 그 편 첫머리의 첫구절 맨 윗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은 것이다. 예컨대 첫권인 學而편은 첫구절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의 맨 위 學而 두글자를 따서 편명으로 삼은 것이다.

각 편에는 다시 孔子와 그의 제자 또는 당시 사람들의 단편적인 언행이나 대화를 적은 글들이 모아져 있다. 이 단편적인 기록들은 다시 여러 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分章 방법은 학자들에 따라 모두 서로 다르다. 그러나 대략 도합 500장 가까운 장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한 장은 이삼십 자 정도의 분량이 대부분이며, 일백 자가 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내용상 각 편의 장들은 앞 뒤 장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따라서 각 편에 따른 통일된 주제도 있을 수가 없게 된다. 편에 따라 그 내용에 두드러진 특징이 있는 경우는 많지만, 한마디로 󰡔論語󰡕의 편찬에는 아무런 체계도 없다 하여도 좋을 것이다.

󰡔論語󰡕의 대부분이 단편적인 대화와 간단한 행동에 대한 서술로 글이 이루어져 있으나, 10鄕黨의 경우처럼 처음부터 끝가지 전편이 孔子의 생활습성이나 몸가짐에 대한 기술로 이루어진 부분도 있다. 심지어는 제18微子와 제20堯曰의 몇 장들처럼 孔子나 그의 제자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글이거나, 또는 누가 쓴 글이고 누가 한 말인지도 분명치 않은 글들조차 들어 있다.

이처럼 孔子를 중심으로 하여 따질 때 󰡔論語󰡕에는 적지 않은 순수하지 못한 기록들도 실려 있다. 특히 󰡔論語󰡕20편을 다시 전 10편과 후 10편으로 나누어 上論下論이라 부르는 습성이 일찍부터 있었던 것도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격의 차이 때문이다. 10편인 하론에는 상론에 비하여 직접 孔子와 관계가 없다고 볼 수 있는 글들이 더 많이 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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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소소한 행복 2019. 3. 8. 00:44

공자시대 1

공자는 기원전 약 500년경에 중국의 노나라에서 태어나 당시로서는 장수인 70여년을 살다 죽었다. 그러나 2500년이 지난 지금 까지 그의 탄생은 잊혀지지 않고 있다. 무엇이 공자라는 한 인간을 아직까지 기억하게 하는가.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공자 자신은 ‘나는 젊었을 때 미천했었다.’고 고백한다. 또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펴기 위해 벼슬을 줄 위정자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혹은 그의 사후 오랫동안) 그의 인생은 다소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고귀한 가문의 후예이며, 태어날 때 용과 천제의  사자들이 하늘을 배회했다고 한다. 그는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서 방안에 앉아서 세상을 알았으며 처음 본 물건의 이름을 맞추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반면에 그는 세습적 귀족정치를 추구한 반동가라고 하는 의견도 있으며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추구한 개혁가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또 그가 민중의 의견을 대신한 선각자라고도 하고 세습 귀족에 빌붙은 봉건주의자라고도 한다.
 무엇이 이토록 공자라는 한 인간의 평가를 다양하고도 서로 상반되게 하는지 먼저 알아보아야만 그의 사상이나 모습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시절은 바야흐로 춘추전국 시대였다.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제후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군주의 자리를 탐했다. 제후의 가신이나 가신의 가신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시시탐탐 침략했으며 점령한 나라도 제후나 가신들의 반란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국가가 커지면 중앙에선 커진 국토를 다스리기 위해 신하를 봉건영주를 책봉했고 영주가 된 제후는 능력을 키워 이내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의 군주를 쳐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 당하는 것은 서민들이었다. 법과 질서는 무너지고 지배 계층의 관심은 정벌이나 사치 뿐 이었으므로 서민들은 전쟁과 폭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공자는 이런 모순을 용납하지 못했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남에게 설득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지배자의 성공 여부를 권력이나 영토가 아닌 백성의 복리 증진 정도에 두었으며 이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불러 그를 유명한 교사로 만들었다.
 공자는 또한 궁극적으로 세습 귀족을 타파하여 유능하고 백성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 이를 빈천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관리로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서민들의 교육 수준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먼저 치중했다. 그렇지만 그는 직접 이런 세상이 오는 것을 보고 싶어했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 시켜 줄 군주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소원을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된 그는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 교육에 몰두하다 곧 죽었다. 이후 그의 생각은 제자들에 의해 점차 널리 퍼졌으며 지배자가 덕과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관념과 정부의 목적이 백성의 행복 증진이라는 관념은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공자의 관념이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세력이 너무나 컷기 때문에 그들은 유가를 매수하거나 공자의 말이 적힌 책에 전제주의적 발언을 삽입함으로써 마치 공자도 자기네 편이었던 것처럼 조작을 했다.
 이렇게 공자의 모습을 왜곡 시킨 것은 그의 반대파만은 아니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공자가 벼슬도 못하고 그렇게 꿈을 실현시키지도 못하고 그냥 죽었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따라서 공자를 유력한 정치가로 묘사하거나 귀족의 태생인 것처럼 꾸민 전기를 속속 내놓았다.
 그렇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거짓과 참을 구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유럽까지 전파되어 Leibniz, Wolff, Voltaire등 서양의 계몽주의 철학 이후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공자에 관한 전설에 관해서는 그 정확성이 오래 전부터 의심 받아 왔다. 공자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100년에 저술된 ‘史記’의 공자 세가에 근거를 두는 것인데 사건의 배열이나 인과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있어 저자인 사마천의 악의 마저도 의심받고 있는 중이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어쨌든 공자의 전기에서 사실과 전설을 구별해 내는 일은 무척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서로 상반된 진술이 동일한 서적 안에서 발견되고 그것이 둘다 공자의 말이었다고 한다면 결국 공자는 2500년이나 인류에 영향을 끼칠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토록 오랜 기간을 인류가 속았을리 없고 당장 그의 제자들이 그런 이중적인 스승의 모습을 보고 옆에 붙어 있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공자에 관한 자료 중에서 전설을 구별해 내는 일은 불가결 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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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심보감 ( 선행 )

1.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벌을 준다.
2. 좋은 일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해야 하며, 나쁜 일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한다.
3. 많은 돈을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주더라도 자식이 다 지켜 내기는 어려우며, 많은 책을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주더라도 자식이    그 책을 다 읽기는 어렵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착한 일을 해서 쌓은 많은 덕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만 못하다.
4. 은혜와 의리를 널리 베풀어라. 사람이 어디에서 산들 서로 만나지 않겠는가?
5. 원수와 원한을 맺지 말라. 길이 좁은 곳에서 마주치면 회피하기 어렵다.
6. 하루 착한 일을 했다고 해서 복이 바로 생기지는 않더라도 재앙은 저절로 멀어질 것이며, 하루 나쁜 짓을 했다고 해서 재앙이 바로 내리지는 않더라도 복은 저절로 멀어질 것이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봄 동산에 자라나는 풀과 같아서 그풀이 자라는 모습을 눈으로 볼 수는 없어도 날로 자라나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은 칼을 가는 숫돌과 같아서 눈앞에서 숫돌이 깎이는 것을 볼 수는 없지만 날로 닳아 없어지게 될 것이다.
7. 착한 일을 보거든 다 해내지 못할 것처럼 빨리 서둘러 하고, 나쁜 일을 보거든 마치 끓는 물에 닿았던 손을 떼듯이 하라.


                              명심보감 ( 몸,마음을 바르게 하는 길 )

1. 다른 사람이 착한 일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착한 점을 찾아보고, 다른 사람이 나쁜 일 하는 것을 보면 자신의 나쁜 점을 찾아보라. 이렇게 하다 보면 유익함이 있다.
2. 다른 사람의 잘못은 마땅히 용서할지라도, 남에게 용서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
3. 부지런함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며, 정성스러움은 몸을 지켜 주는 보증이 된다.
4.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 정신이 상쾌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면 잠을 편히 잘 수 있다.
5. 남을 알려고 한다면 먼저 자신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남을 해치는 말은 도리어 자신을 해치는 말이 되니, 입에 더러운 것을 머금어 남에게 뿌린다면 먼저 자기의 입이 더러워진다.
6. 남의 오이밭을 지나갈 때에는 신을 고쳐 신지 말고, 남의 배나무 아래에서는 모자를 고쳐 쓰지 말라.
7.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하고 지위가 낮더라도 즐겁지만,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부유하고 지위가 높더라도 근심스럽다.
8.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도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에는 밝고, 지극히 똑똑한 사람도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는 데에는 어둡다. 그렇지만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잘못을 꾸짖고,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의 잘못을 용서한다면, 훌륭한 사람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9. 남에게 조금씩 나누어주면서 남으로부터 받을 때에는 많이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답 받을 수 없고, 잘 된 뒤에 어려웠을 때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잘 된 상태로 오래 갈 수 없다.
10.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을 때에는 보답 받기를 바라지 말 것이며, 남에게 주었을 때에는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

11. 여러 사람이 좋아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여러 사람이 미워하더라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12.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공무원이 자기 욕심만을 채운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에 후회하게 된다.
13. 돈이 많을 때에 아껴 쓰지 않으면 가난해졌을 때에 후회하게 된다.
14. 재주만 믿고 어렸을 때에 배우지 않으면 배울 시기가 지났을 때에 후회하게 된다.
15. 어떤 일을 보기만 하고 배워 두지 않으면 그 일이 필요해졌을 때에 후회하게 된다.
16. 술이 취했을 때에 함부로 말하면 깨고 나면 후회하게 된다.
17. 건강할 때에 조심하지 않으면 병들었을 때에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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